나무_고다 아야

‘나무’라고 읽고 ‘사람’이라고 쓴다.

굽은 편백나무의 내재적 이유

중학교 3학년 딸아이가 “쓸모없는 녀석”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머릿속엔 별별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때로는 “엄마, 시험 때문에 짜증 나요,” 때로는 “사랑해주세요,” “미안해요,” 혹은 “공부가 너무 어려워요”라는 다 다른 질문처럼 들려온다. 맥락에 따라 다르게 들리지만, ‘쓸모’라는 단어의 자본주의적 기준은 늘 불편하게 다가온다. 그 단어는 마치 칼날이 되어 아이의 여린 자아를 베어내는 듯하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쓸모’를 판단하고, 그 잣대 위에서 인간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걸까? 그리고 딸아이의 그 조용한 속삭임 속에서, 나는 고다 아야의  『나무』라는 책을 떠올린다. 이 책은 단순히 나무를 기록한 것을 넘어, 작가 고다 아야의 자기 개념이 나무를 통해 투사되고 의인화되는 과정의 백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녀가 인생의 말년에 전하는 메시지는, 자신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는 다음 세대인 내 딸에게 어떻게 전달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깊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사회적쓸모라는허상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쓸모’를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좋은 성적, 안정적인 직업, 높은 수입, 예쁜 외모… 이 모든 것이 ‘쓸모 있는 인간’의 증표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사회적 압력은 마치 “이 편백나무는 곧지 못하고 굽었으니, 가공하기 어려워 쓸모가 없다”고 단정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 획일적인 기준에 따라 서로를 재단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딸아이가 느끼는 “쓸모없음”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쓸모’의 기준이 만들어낸 환영일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나 효율성으로 자신을 평가하며, 그 틀에 맞지 않을 때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다 아야는 이러한 잣대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녀는 굽은 편백나무를 사람들이 ‘멸시와 성가심’으로 평가하는 것에 도저히 승복할 수 없었다. 그 애탐은 바로 인간존재의본질적인가치를외부의기준에의해침해당하는것에대한깊은저항이었다.

존재자체의 가치: ‘있음의철학적의미

고다 아야의 통찰은 곧 ‘쓸모’를 넘어선 존재자체의가치를 긍정하는 철학으로 이어진다. 이는 서양 철학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와도 맞닿아 있다. 실존주의는 인간이 미리 정해진 본질이나 목적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스스로의 선택과 책임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창조해 나간다고 본다. 고다 아야에게 굽은 편백나무는 단지 ‘재목으로 쓸모 있는가’라는 기능적 질문을 넘어선다. 그 굽어진 형상은 수많은 비바람과 세월을 견뎌낸 삶의흔적이자고유한역사를 담고 있다. 곧은 나무와는 다른, 오직 그 나무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지닌다. 이는 마치 프리드리히 니체가 주장한 “운명애(amor fati)”와도 유사하다. 삶의 모든 것, 심지어 고통과 불완전함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극복에 이르는 태도다. 굽은 편백나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존재인 것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거나 특정 결과를 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귀하고 유일하며, 어떠한 외부의쓸모기준도 그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 딸아이가 당장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해도, 특별한 재능을 보이지 않아도,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완벽히 들어맞지 않아도 괜찮다. 그녀는 그저 그녀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불완전함속의충만함

더 나아가 고다 아야는 굽은 편백나무의 불완전함속에서 독특한 아름다움과 예측 불가능한 가능성을 보았다. 곧은 나무가 줄 수 없는 어떤 형태와 의미를 굽은 나무는 지니고 있었다. 이는 미술치료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적 시선에 의해 왜곡될 수 있는 신체상(Body Image)을 스스로 긍정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과도 같다. 자신의 불완전한 모습을 결함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자신을 특별하고 고유하게 만드는 요소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의 약점, 실수, 그리고 사회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들은 결코 ‘쓸모없음’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고, 성장의 계기가 되며, 우리만의 삶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요소들이다. 동양 철학, 특히 불교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같이, 완벽을 좇기보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진정한 의미와 깨달음을 찾아가는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딸에게 전하는 굽은 편백나무의 메시지

사랑하는 딸에게, ‘쓸모’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나무의 성장이 중심부가 아니라 항상 바깥쪽으로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며 이루어지듯이, 우리의 삶도 새로운 경험들을 더해가며 끊임없이 확장된단다.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와 변형, 그리고 지나간 세월의 흔적들은 안쪽 깊숙이 고스란히 감싸 안아 더욱 단단하고 아름다운 너를 만들어 갈 거야. 너는 세상에 하나뿐인 굽은 편백나무와 같단다. 세상 사람들이 너에게 ‘곧게 뻗어라’, ‘쓸모 있어라’ 강요해도, 너는 너만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굽어 자랄 수 있단다. 너의 굽은 모습이 바로 너의 특별한 이야기이고, 너를 너답게 만드는 귀한 흔적이야. 엄마에게 너는 그저 네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완벽한 선물이야.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숨쉬고 웃고 느끼는 것 만으로도너는 이미 충분히 가치있는 존재란다. 고다 아야가 굽은 편백나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긍정했듯이, 우리 모두는 ‘쓸모’라는 협소한 기준을 넘어선, 존재 그 자체로 온전하며 빛나는 귀한가치를 지녔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바로 딸아이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편안한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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