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와 레이먼드 카버, 그리고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
― 『대성당』을 읽고 떠오른 이미지
최근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을 읽었다. 읽는 내내 한 화가의 이미지가 자꾸만 겹쳐졌다. 바로 에드워드 호퍼. 왜 그가 떠올랐을까, 처음에는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그 이유가 감각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카버는 영국에서 ‘더러운 리얼리즘’(dirty realis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곧 미국 리얼리즘 화가로 잘 알려진 호퍼와의 공통점을 떠올리게 한다. 호퍼가 도시의 일상, 고독, 소외를 표현했다면, 카버는 문장의 공백과 행간을 통해 그와 유사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색감은 다르지만, 본질은 닮아 있다.
색은 밝지만 풍경은 고요한 ― 호퍼의 방식
호퍼의 그림은 종종 파스텔 톤의 밝은 색을 사용하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묘하게 고요하고 어둡다. 구도는 공간에 여백이 많고, 인물은 종종 어딘가를 응시하며 말을 잃은 듯하다.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한다.
문장은 짧지만 울림은 길다 ― 카버의 방식
레이먼드 카버의 문장은 단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부사나 내면 묘사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 간결함이 곧 빈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행간의 거리,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이 독자에게 상상력을 요구하고, 정서적인 충만함을 안긴다. 문장 사이에 공기가 흐르고, 그 안에서 독자는 저마다의 경험을 투영하게 된다.
『대성당』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이야기들
1. 깃털들
기존 카버의 단편들과 조금 다른 느낌이 있었다. 이야기 속 공작새는 성서적이고 상징적인 존재로 느껴졌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요소가 하나의 이미지처럼 삽입되어 있다. 이는 르네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일상적인 공간에 들어온 이질적인 존재가 낯섦과 시적 울림을 동시에 만든다.
2. 비타민
비타민이라는 단어는 상품이자, 에너지와 활력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는 그저 무의미하게 소비되는 이름에 불과하다. 인물 간의 관계는 피상적이며, 1980년대의 공허한 소비 문화를 반영한다. 포틀랜드라는 지명도 나온다. 새로운 시작일 수도, 혹은 단지 현실 도피의 상징일 수도 있다.
3. 열
‘열’은 단순히 신체적인 피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가 떠났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감추려 했던 주인공이 열병이라는 계기를 통해 그것을 인정하고, 마침내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다. 특별한 사건 없이 일상 속에서 조용히 스며드는 성장의 이야기다.
4. 대성당
이 단편은 ‘보는 것’에 대한 본질을 다시 묻게 만든다. 우리는 눈이 있어도 진짜로 보고 있는 걸까? 시각장애인과 함께 대성당을 손으로 그리는 장면은 말로 표현되지 않은 울림을 준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이 말하고 있는 카버의 세계가 가장 극대화된 작품이다.
귀는 있지만 들리지 않고, 눈은 있지만 보지 못하는 세계
카버의 문장은 줄임으로써 말하고, 침묵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대성당』은 단지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듣고 말하고 본다’는 것은 단순한 감각의 작용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일지도 모른다.
호퍼의 그림 앞에서 느꼈던 정적과 여백, 그 침묵의 힘. 그리고 카버의 문장 속에서 마주한 무채색의 감정들. 서로 다른 매체지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