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그리고 밀양:구원에 관하여

도스토엡스키의 <죄와 벌>의 루쥔은 자기 합리화가 철저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근본적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윤리적 딜레마 속에서 고통받는 라스콜니코프와 달리,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믿으며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 밀양의 가해자는 신의 용서를 받았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최소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망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죄’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방식(비록 신을 통한 일방적인 구원이지만)을 찾는다. 이런 점에서 루쥔보다는 훨씬 더 ‘구원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구원이 진정한 구원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피해자인 신애의 용서를 구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죄가 신의 용서만으로 해결된다고 믿는다. 이는 마치 “나는 이제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는 자기 합리화 속에서 구원 자체를 부정하는 루쥔과 달리, 구원의 개념을 인정하고 그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밀양의 가해자는 루쥔처럼 구원을 아예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받은 구원이 완전한 것인지도 의문을 남긴다.

루쥔과 밀양의 가해자의 구원 방식

루쥔은 자신의 행동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도덕적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행동이 논리적으로 옳다고 확신하며, 도덕적 고민조차 하지 않는고 사람을 착취하면서도 이를 정당하다고 믿으며, 법적으로 처벌받지도 않는다. 따라서 루쥔은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으며, 사회 속에서 성공하려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변화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결국 루쥔은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받을 필요도 느끼지 않는 인물이다.

반면, 밀양의 가해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만, 그 해결 방식을 신의 용서에서 찾는다. 그는 신앙을 통해 내적 평안을 얻었다고 믿지만, 피해자인 신애에게는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적 속죄의 부재를 보여준다. 그는 신앙을 통한 구원을 구하지만, 그것이 피해자의 용서 없이 완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구원의 가능성과 방식

루쥔과 밀양의 가해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죄를 인식하며, 구원에 대한 태도 또한 크게 다르다.

먼저, 루쥔은 자신의 행동을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합리화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타인을 착취하고 조종하면서도 윤리적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구원의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바꿀 이유도 찾지 않는다. 그의 세계관에서는 구원이란 개념이 불필요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것을 구하려는 노력조차 없다. 결과적으로 그는 변화할 가능성이 없으며, 구원을 받을 수도, 받을 필요도 없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반면 밀양의 가해자는 적어도 자신의 행동이 죄였다는 걸 인정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믿는다. 다만 그 방식이 신을 통한 구원이라는 점에서 인간적인 차원의 속죄와는 거리가 있다.하지만 그는 신의 용서를 통해 자신의 죄가 해결되었다고 믿을 뿐, 피해자인 신애에게 직접 용서를 구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신앙을 선택했고, 이를 통해 내적 평안을 얻었다고 여기지만, 인간적 차원의 속죄를 회피하는 모습도 보인다.
신애가 직접 가해자를 찾아갔을 때, 그는 너무도 태연한 얼굴로 “저는 이미 신의 용서를 받아서 편안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잊은 듯 보이지만, 그가 정말로 완전히 자유로운지는 불분명하다.
결국 그는 신앙을 통해 구원을 구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완전한 속죄로 이어지는지는 의문을 남긴다. 그의 구원은 신의 용서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으로, 피해자의 용서라는 인간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것이 진정한 구원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그는 적어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지만, 그 방식이 인간적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

누가 더 악한가?

윤리적 무감각, 철저한 자기합리화라는 점에서 루쥔이 더 악할 수 있다. 그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그것을 악이라 여기지 않으며, 자신을 교정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변화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인물이다.

밀양의 가해자는 죄를 인정하고 회피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적어도 구원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을 구하려는 행동을 한다. 다만 그 방식이 피해자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속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결론적으로, ‘구원의 필요성조차 못 느끼는 악’(루쥔)이 ‘구원을 구하지만 불완전한 악’(밀양의 가해자)보다 더 근본적인 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밀양의 가해자가 종교적 구원을 통해 너무 쉽게 죄책감을 덜어내는 태도 또한 또 다른 형태의 악일 수 있다. 진정한 속죄 없이 신의 용서만을 믿는 것은, 피해자의 고통을 무시하는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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