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 일지] 색지 만들기_2 

오일 파스텔과 테레핀, 그리고 스크라피토로 완성한 실험적인 작업

 300g의 도톰한 A4 도화지 위에 시넬리에 오일 파스텔을 활용하여 나만의 색지를 만들어보는 프로젝트였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재료 운용과 도구를 실험해 보며 색다른 질감을 찾아가는 흥미로운 시간이 되었다.

1. 색채 레이어와 예상치 못한 강렬함

먼저 화면에 반원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시넬리에 제인 플루오레센트(Jaune Fluorescent) 색상으로 반원을 반쯤 그린 뒤, 그 면을 전체적으로 촘촘하게 채워 나갔다. 그 위에 오렌지 플루오레센트(Orange Fluorescent)를 얹으려고 간격을 촘촘하게 배치했는데, 막상 오렌지가 올라간 순간 생각보다 훨씬 강렬한 발색에 적잖이 당황했다.

오렌지 컬러의 세기를 조금이라도 중화하기 위해 듬성듬성하게 터치를 조절해 보았지만, 고유의 색감 자체가 워낙 강해 그대로 두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이를 부드럽게 감싸고 전체적인 톤을 잡아주기 위해 아전트 실버(Argent Silver)를 더한 뒤, 일정한 필선으로 휙휙 돌려가며 전체적인 색감의 1차 레이어를 마무리했다.

2. 테레핀과 유화붓을 이용한 변주와 감각적 경험

하지만 이 단계까지의 결과물은 예상했던 것보다 마음에 완전히 와닿지는 않았다. 여기서 방향을 틀어, 유화 붓에 테레핀(Turpentine)을 묻혀 화면 위에 얹어진 오일 파스텔을 적극적으로 녹여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물리적인 신체 감각이 강하게 개입했다. 유화 붓으로 묵직한 오일 파스텔 층을 문지르고 녹여내는 작업은 손끝과 팔에 상당한 힘이 들어가는 노동이자 집중의 과정이었다. 또한 작업 공간 전체에 퍼지는 특유의 알싸한 테레핀 냄새를 코로 지각하며 작업에 임했다. 후각적 자극과 붓을 쥔 손의 근육 감각은 지금 내가 무언가를 강렬하게 해체하고 재조립하고 있다는 몰입감을 극대화해 주었다.

테레핀을 머금은 붓으로 문지르고, 지워내고, 닦아내는 과정을 거치자 오일 파스텔의 묵직한 물성이 부드럽게 풀리면서 색상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단순한 덧칠과는 전혀 다른 은은하고 깊이 있는 회화적 결이 만들어졌다.

3. 스크라피토기법과 색감의 정화, 그리고 깊은 울림

마무리 단계에서는 유화 붓의 뒤편에 있는 뾰족한 부분을 활용했다. 녹아내린 오일 파스텔 층 위로 과감하게 선을 긁어내는 스크라피토(Sgraffito) 작업을 시도했다.

긁어낸 틈 사이로 아래에 깔려 있던 도화지의 질감과 밑색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앞서 진행했던 텁텁할 수 있는 색감들에 리듬감과 입체감이 살아났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경험을 마주했다. 테레핀으로 엉켜 있던 과도한 색감을 덜어내고 은은한 통일감을 찾아가는 순간, 완성된 화면의 고요하고 정제된 아름다움에 문득 눈물이 났다. 그 색이 너무나 곱고 깊어서, 마음 안쪽에서부터 뜨거운 위로와 울림이 차올랐다.

강렬한 형광 컬러의 충돌로 시작해 테레핀의 번짐과 스크라피토의 날카로운 손길, 그리고 색채의 정화를 거쳐 마침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깊이 있는  색지가 완성되었다.

매체(Medium) 중심적 접근과 표현예술치료(ETC)적 의의

이번 작업은 단순히 ‘그림을 그린다’는 목적을 넘어, 미술 재료의 물성과 신체적 감각, 그리고 내면의 정서가 깊이 상호작용하는 심오한 과정을 보여준다.

  • 매체중심적 접근 (Medium-Centered Approach): 오일 파스텔의 꾸덕하고 유성적인 질감, 테레핀이라는 화학적 용매, 그리고 붓과 뾰족한 도구라는 하드웨어가 만나 물질 자체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계획된 형태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재료가 스스로 녹고 섞이며 만들어내는 우연성과 물성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매체와의 대화가 깊어졌다.
  • 표현예술치료(Expressive Therapies Continuum, ETC)적 의의:
    • 감각/운동레벨(Sensory/Kinesthetic): 300g의 두꺼운 종이 위에서 유화 붓을 강하게 밀고 문지르는 신체적 행위, 그리고 테레핀의 후각적 자극은 감각 및 운동 체계를 직접적으로 자극한다. 이 과정에서 쌓인 에너지를 방출하고 신체적 긴장을 해소하는 정화(Catharsis) 효과가 일어난다.
    • 인지/상징및정서레벨(Cognitive/Affective/Symbolic): 예상치 못한 오렌지색의 강렬함에 당황했다가 테레핀으로 녹이고 스크라피토로 긁어내며 통제와 해방을 오가는 과정은 내면의 혼란을 조율하는 심리적 통합을 뜻한다. 특히 과도한 자극과 색감을 덜어내며 마주한 ‘통일된 고운 색감’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예술적 작업을 통해 억압되거나 분산되었던 감정이 정화되고 깊은 자기 수용과 치유적 위안(Aesthetic Response)에 도달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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