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FW 아크릴 잉크’라는 매체가 가진 거침없는 유동성과 선명한 발색.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유연하게 흘러내리는 이 재료를 스포이드라는 도구로 다루어보고 싶다는, 일종의 재료적 궁금증이 이번 작업의 출발점이었다. 거친 질감의 황목 수채화지를 바닥에 깔아 두고, 나는 미지의 재료가 가진 본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밑그림도 없이, 오직 스포이드 끝에서 툭툭 떨어지는 잉크의 우연적인 번짐에 몸을 맡겼다. 잉크는 제멋대로 흐르고 번지며 종이 위를 채워 나갔다. 하지만 액체 상태의 재료가 가진 한계와 도구의 제약은 금세 눈앞의 벽으로 다가왔다. 통제력을 잃어가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새로운 선택을 감행했다. 물기를 머금은 수채화 붓 대신, 빳빳하고 견고한 유화 붓을 손에 쥔 것이다. 부드러운 수채화지 위에서 유화 붓으로 잉크를 통제해 나가는 과정은 기분 좋은 반전이었다. 잉크의 무작위한 흐름 속에서, 유화 붓의 묵직한 터치로 인물의 윤곽을 단단하고 견고하게 구축해 나갔다.
우연에 맞서는 순간, 재료의 실험은 ‘나를 찾아가는 퍼포먼스’로 확장되었다.
틀이 잡힌 화면 위로 리퀴텍스 소프트 바디와 페인팅 나이프를 가져갔다. 나이프 날 끝에서 으깨어지는 물감들은 머리카락의 강렬한 입체적 마티에르(질감)로 거듭났고, 그 평면 위에 마지막으로 오일 파스텔의 진득한 질감을 얹어내며 요동치는 감정의 정점을 찍었다.
처음에는 그저 재료가 궁금해서 시작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과 재료의 반항 속에서 직관적으로 도구를 바꾸고, 질감을 쌓아 올리며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나 자신을 목격했다. 거친 황목 위에 스포이드로 시작해 붓과 나이프, 오일 파스텔로 겹겹이 쌓아 올린 이 인물의 형상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재료의 제약을 넘어서며 격렬하게 부딪히고 타협했던 그 모든 순간이, 결국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편안한 통제를 벗어나 우연에 응전했던 그 과정 자체가 바로 나였다.
사용 재료 및 도구
- Base: 황목 수채화지
- Medium: FW 아크릴 잉크, 수채화 물감, 리퀴텍스 소프트 바디, 오일 파스텔
- Tool: 스포이드, 유화 붓(수정용), 페인팅 나이프(질감용)

1. FW아크릴 잉크(indigo)를 스포이드로 드로잉

2. 수채화 물감으로 번지기 및 뿌리기

3. 아크릴 물감과 오일파스텔로 마무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