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재료] 긁고, 번지고, 겹치다

: 벽이라는 이름의 기억을 조각하는 시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스크래치 기법’은 보통 밑색을 칠하고 그 위에 검은 크레파스를 덧칠한 뒤,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내며 색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번 작업에서 저는 그 익숙한 문법을 완전히 뒤집어보기로 했습니다. 미리 종이를 긁어내고, 그 위에 수채화 물감을 올리는 방식인 ‘역방향 스크라피토(Sgraffito)’를 통해서 말이죠.

철필끝에 맺힌 인내의 시간

이번 작업의 소재는 ‘벽’이었습니다. 수원 화성의 견고한 성곽을 떠올리며 300g 이상의 황목 수채화지를 펼쳤습니다. 철필을 꾹꾹 눌러 종이의 결을 파내려가는 일은 생각보다 더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연필처럼 부드럽게 나가지 않는 철필의 저항을 견디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과정은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답답함과도 같았습니다.

오른손의 피로가 극에 달할 때쯤, 저는 왼손을 빌려 선을 이어갔습니다. 그 어색하고 느린 손놀림조차 벽의 질감을 완성해가는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수채화의 번짐, 선에 생명을 불어넣다

밑그림이 완성된 뒤, 물을 듬뿍 머금은 붓에 회색 수채화 물감을 묻혀 종이 위를 덮었습니다. 번져 나가는 어두운 물감들. 그 순간, 제가 억지로 새겨두었던 철필의 흔적들이 물감의 농담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기존의 스크래치가 날카로운 대비를 자랑한다면, 이 방식은 물감의 번짐 속에 드로잉이 은은하게 녹아드는 ‘사유의 깊이’를 만들어내더군요. 그 우연한 만남은 저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재활의 현장에서 확장된 예술

이 기법은 단순히 저의 개인적인 작업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미술 재활의 현장에서 아동들이 작업을 몰입하면서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가질 수 있을지 한번 내담자 입장에서 같이 숨쉴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벽돌의 형태를 딴 도장을 찍고, 어두운 바탕 위에 다시 밝은 색을 입히는 등의 구조화된 과정에서 좀더 고민한 재료에 대한 해석과 과정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성곽이라는 단단한 형태를 반복적으로 찍어내고 긁어내는 행위에서 구조화하면서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정서적 안정감’을, 그리고 저에게는 ‘벽이라는 소재가 가진 시간성과 세월의 흔적’을 온전히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주었습니다.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키친타월을 이용해 물감을 닦아내고 오일 파스텔로 거친 질감을 더했습니다. 황목 종이 특유의 결은 돌의 물성을 고스란히 머금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무언가를 긁어내고 지워내며 상처를 남기지만, 그 상처가 물감과 어우러져 새로운 풍경이 될 때 비로소 ‘단단한 벽’이 완성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오늘 제가 표현한 것은 단순히 수원 화성의 벽이 아니라, 스스로 견뎌온 시간과 긁어낸 흔적들로 빚어낸, 조금은 투박하지만 아주 단단한 나의 내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Tip. 오늘사용한기법요약

  • 준비물: 300g 황목 종이, 철필, 수채화 물감(제인 그레이), 키친타월, 오일 파스텔
  • 포인트:
    • 1. 미리 긁어내어 요철 만들기(철필 드로잉)
    • 2. 수채화 번지기를 통해 선 자연스럽게 노출하기
    • 3. 키친타월과 오일 파스텔로 질감(Texturing) 완성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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