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색스의 《On the Move》에서 읽는 ‘이동(Move)’과 ‘접촉(Contact)’의 의미
현대 의학은 종종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정밀한 기계 부품처럼 분해하고, 질병을 통제해야 할 오류의 목록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신경학자이자 서사 의학(Narrative Medicine)의 선구자인 올리버 울프 색스(Oliver W. Sacks)는 이와 다른 궤도를 걸었다. 그가 남긴 자서전 《On the Move》는 단순한 일대기의 나열을 넘어, 인간의 뇌와 정신을 다루는 의사가 어떻게 실존의 비극과 경이로움을 마주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철학적 고백록이다. 이 글에서는 올리버 색스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 화두인 ‘움직임(Move)’과 ‘접촉(Contact)’의 의미를 심리학적·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레니 이모와 가족의 품에서 얻은 정서적 안정, 영국의 보수성을 넘어 대서양을 건넌 실존적 도약, 톰 건(Thom Gunn)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이중적 자아의 양가성, 감각과 인지를 넘나드는 그의 역동적 면모와 더불어 그가 평생 글을 놓지 않았던 내면의 이유를 통해 그가 추구했던 삶의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면밀히 짚어보려 한다.
올리버 색스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의 본질은 환자의 내면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지배적 ‘안(In)’의 시선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맞닿아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On’의 또 다른 단어인 접촉(Contact)에 있다. 전통적 의학이 환자를 객관화하여 분석하려 했다면, 색스는 루드비히 빈스방거(Ludwig Binswanger)의 현존재분석(Daseinsanalyse)처럼 환자가 살아가는 독특한 실존적 세계(Welt)를 인정했다. 그는 환자의 증상을 고쳐야 할 결함으로 보지 않고, 그 순간 마주한 현상학적 장(Phenomenological field) 속에서 온전히 존재를 알아차렸다. 무언가를 억지로 ‘해주려’ 하지 않고 그저 곁에 머무는 태도는 환자에게 깊은 실존적 안도감을 부여했다. 이는 아버지가 환자들의 몸 상태 못지않게 그들 내면의 사정까지 이해하려 했으며, 그렇게 속 깊이 이해하지 않고는 몸도 치료할 수 없다고 믿었던 태도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아울러 색스는 “어떤 학생이건 점수나 시험성적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느꼈는데, 추상적인 공감 능력, 배려심, 책임감 같은 것은 점수를 매길 수 없는 소중한 자질이기 때문이었다.
올리버 색스가 청년기 영국을 떠나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향했던 과정은 단순한 도피나 방황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서적 토대의 충만함과 새로운 확장이라는 양립하는 동력의 결과였다. 레니 이모(Aunt Len)를 비롯한 친지들과 부모님 품에서 얻은 깊은 이해와 가족 안의 유대감은 색스의 내면에 든든한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했다. 그가 고국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을 사랑하지 마지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과 지지가 내면을 충분히 채워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영국은 당시 그에게 너무나 보수적인 억압의 공간이기도 했다. 자신의 성 정체성(Sexual identity)과 주체적인 에너지를 온전히 해소하기에는 고국의 울타리가 너무 협소했다. 결국 충만한 정서적 안정이 뒷받침되었기에, 그는 미지의 세계인 캐나다와 미국으로 대담하게 발을 내딛고 ‘On the move’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색스의 내면에는 지적이고 질서 정연한 의사로서의 ‘올리버’와, 오토바이를 몰며 가혹한 억압과 규범을 뚫고 야성적으로 질주하던 ‘울프(Wolf)’라는 이중적 자아가 공존했다. 인간이 사회적 규범 속에 얌전히 살아가려 해도, 그 육신과 유한한 힘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원초적 본능과 충동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본 〈On the Move〉가 본능이 부족한 인간이 의지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렸다면, 늑대 소년의 우화는 정반대로 사회적 통제 아래 억눌려 있던 야성적 본능이 달빛을 만나 터져 나오는 과정으로 풀어낸다. 이 양가성(Ambivalence)은 평생 그를 괴롭힌 실존적 갈등이자 화두였다. 조너선 밀러가 건네준 톰 건의 시집과 그 속의 〈On the Move〉는 색스의 영혼을 정확히 관통했다. 톰 건의 시가 노래하듯, 인생의 목적지가 불확실할지라도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음으로써 세상과 더 가까워진다는 메시지는 색스의 삶 그 자체였다.
“At worse, one is in motion; and at best, Reaching no absolute, in which to rest, One is always nearer by not keeping still
아무리 나빠도 움직인다. 아무리 좋아도 절대에 가닿지 못하는, 안식할 곳 없는 우리, 언제나 멈춰 있지 않아, 더 가까워진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완벽한 해소나 안착을 이루지 못한 채, 끊임없이 방황하고 갈등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 자체를 택했다.
올리버 색스는 가만히 책상에만 앉아 사색하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오토바이를 광적으로 몰고, 대륙을 횡단하고, 수영을 하고, 거대한 무게를 드는 격렬하고 역동적인 신체적 행위를 삶의 중심에 두었다. 그 거친 질주와 동적 행위는 단순히 무모한 일탈이 아니라, 유년 시절부터 그를 짓누르던 불안, 가족 안의 상처와 형 마이클의 정신분열증, 그리고 숨겨야만 했던 성 정체성의 억압을 뚫고 나가기 위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주체적인 통제 방식’이었다. 속도와 중력, 신체의 한계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얻어내는 그 동적 몰입 속에서 그는 비로소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강렬한 통제된 만족감(Controlled Satisfaction)을 느꼈다. 모터사이클을 탈 때면 탑승자와 장비가 일체화되어, 타는 이의 고유수용감각(Proprioception, 몸의 움직임과 자세에 대한 감각)이 극도로 활성화되었다. 그는 전조등 불빛 속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도로가 앞바퀴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했고, 기이한 지각 반전(Perceptual inversion)과 환각을 겪었으며, 자신이 땅 위에 가만히 정지해 있는데 발밑으로 지구가 소리 없이 회전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는 외부 자극과 내면의 심리·감각이 하나로 일치되는 동형대응(Isomorphism)의 몰입감을 삶 속에서 충만하게 누렸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감각적 경험에만 머물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는 거대한 ‘인지적 잔해와 사유(Cognitive residue)’가 남았다. 그는 의사이자 과학자로서 그 파장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분류하고, 해석하고, 글로 풀어내는 작업을 병행했다. 즉, 몸으로 격렬하게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인 동적 행위와 감각을 통해, 그 파장과 잔해를 치밀한 인지의 수 많은 퍼즐로 재조립하여 문장과 서사로 직조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올리버 색스라는 작가이자 신경학자의 고유한 작동 방식이었다. 결국 그에게 동적 행위는 세상을 향해 돌진하는 엔진이었고, 원심성(Efferent)과 구심성(Afferent) 사이를 오가는 반응과 질주 속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기록하는 일종의 나침반으로 인지를 사용하였다. 가만히 정지해 있으면 오히려 불안해지고, 끝없이 움직이고 무언가를 탐구해야만 비로소 안정을 찾았던 그의 삶은, 몸의 감각과 고도의 인지가 가장 아름답게 결합한 한 편의 거대한 실존적 드라마였다. 참고로 톰 건에 대해 쓴 설명을 보면, 톰 건 역시 비꼬는 태도와 그로데스크한 기질(Grotesque temperament)을 가졌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가 올리버 색스의 생일에 써준 시(“1997년 소철과 사랑에 빠진 이 남자… 여전히 인생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이 남자”) 역시 그의 복잡다단한 정체성과 삶의 궤적을 완벽하게 요약해 준다.
외부 세계를 향해 있던 그의 치열한 호기심과 내부를 향한 고독한 방랑은 결국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하나로 수렴되었다. 그에게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로 충분했다. 글을 쓰다 보면 생각과 감정이 분명하게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색스에게 일기는 자신과 단둘이 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자신과의 대화에 필수적인 형식의 글이었다. 또한 편지 역시 그의 인생에서 큰 자리를 차지했으며, 편지는 쓰는 것도 받는 것도 모두 좋아했다. 그는 스스로를 ‘이야기꾼’이라고 규정하며, 좋든 나쁘든 자신은 이야기꾼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경향, 서사를 좋아하는 경향은 언어 능력, 자의식, 자전기억과 더불어 인류의 보편적 특성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글쓰기는 잘될 때는 만족감과 희열을 가져다주었으며, 이는 처음 글쓰기를 시작하던 거의 70년 전의 그날 느꼈던 그 마음과 같았다. 이러한 글쓰기의 면면은 그가 왜 그렇게 열심히 글을 썼는지를 명확히 알려준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숨겨야 했던 동성애자로서의 삶, 어린 시절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을 앓던 형 마이클을 온전히 구원하지 못했던 부채감 등 내면의 깊은 그림자 속에서, 글쓰기는 그가 고통을 회피하거나 고정된 결론(Result)에 안주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과 접촉하며 나아가는 ‘과정(Process)’ 그 자체였다.
올리버 색스의 《On the Move》가 주는 울림은 그가 완벽한 정답을 찾아낸 현자가 아니라, 끝까지 불완전함을 안고 방랑한 인간이었다는 데에 있다. 레니 이모와 가족들의 품 안에서 얻은 충만한 사랑과 안정감은 그가 고국 영국을 떠나 캐나다와 미국이라는 미지의 대륙으로 도약할 수 있는 든든한 날개가 되어 주었다. 비록 보수적인 고국의 억압 속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완전히 풀지는 못했지만, 그는 그 그리움과 호기심을 품은 채 끝없이 이동했다. 질병이라는 가혹한 운명 앞에서 무너진 이들을 차가운 통계로 재단하는 대신 따뜻한 접촉면을 형성했고, 70년 가까이 일기와 편지, 서사의 힘을 빌려 자신과 세상에 말을 걸으며 “나는 끝까지 움직인다”는 실존적 선언을 남겼다. 정체성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찾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확장하고 방황하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가장 높은 가치를 지켜낸 한 인간의 위대한 과정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