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재료] 지우개로 쌓고, 테이프로 구획하다

아이들의 손끝에서 피어난 성벽

미술재활 수업에서는 존 에이지의 그림책 《무슨 벽일까?》를 읽는 것으로 성곽 수업의 문을 열었습니다.커다란 벽, 그리고 그 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이 벽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있을까?”, “벽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아이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을 벽돌 한 장 한 장에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벽돌에 담긴 온기

수원 화성의 차가운 회색빛 성곽 대신, 우리가 선택한 것은 붉은 기가 감도는 벽돌색이었습니다. 번트 시에나(Burnt Sienna)와 번트 엄버(Burnt Umber)의 깊은 갈색 위에 나프톨 크림슨의 붉은 열기를 더했습니다. 미젤로의 매트 화이트로 농도를 조절하며 벽돌 하나하나에 온기를 입혔습니다. 처음 의도했던 것보다 붉은 기가 강하게 올라와 당황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종이에 찍어낸 색감은 시간이 겹겹이 쌓인 낡은 벽돌의 색을 닮아 있었습니다. 물감의 농도를 팔레트에서 100% 조절하기보다, 찍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그 우연한 섞임과 번짐을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그림책 속의 벽이 아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호기심의 통로였듯, 우리의 붉은 벽돌들도 아이들의 마음을 통과하는 따뜻한 울타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선’이라는 경계에 대하여: 아이들과의 수업에서 배운 것

지우개를 도장처럼 활용하는 기법은 복잡한 구조를 그려내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훌륭한 대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업 중 ‘벽돌 줄 맞추기’라는 뜻밖의 난관을 만났습니다. 4명의 아이 중 줄을 맞추는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는 친구는 한 명 정도였죠.

하지만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벽의 완벽한 구조가 아니라, 지우개를 꾹꾹 눌러 찍으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그 순간의 몰입이라는 것을요. 어떤 아이는 정갈하게 줄을 맞추고, 어떤 아이는 자유롭게 흩뿌리며 각자의 벽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들은, 정교한 성벽만큼이나 각자의 개성이 묻어나는 소중한 벽이 되었습니다.

우연이 만드는 진짜 ‘벽’의 표정

완벽하게 섞이지 않은 물감, 지우개 도장이 만들어내는 제각각의 얼룩들. 이 모든 ‘우연’들이 모여 비로소 하나의 벽을 완성했습니다. 마스킹 테이프로 구획을 나누어 세워진 벽과 평면적인 벽의 구도를 달리했을 때, 비로소 전체적인 균형이 잡혔습니다. 정교한 직선과 지우개 도장이 만든 거친 벽돌의 질감이 만나, 아이들의 서툰 손길은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따뜻한 성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우개를 꾹꾹 누르며, 그저 벽돌을 찍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단단한 시간을 벽 위에 쌓아 올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똑바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 삐뚤빼뚤한 벽돌 하나하나가 모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신만의 성을 완성해가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읽었던 그림책 속 질문, “이건 무슨 벽일까?”에 대해, 이제 아이들은 각자의 대답을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절이 아닌 소통과 치유의 벽이었습니다.

Tip. 오늘 사용한 ‘벽 찍기’ 기법

  • 도입 활동: 존 에이지의 그림책 《무슨 벽일까?》 읽기 – 벽의 의미와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해 상상하며 질문 던지기.
  • 주요 재료: 조소냐 과슈(번트 시에나, 번트 엄버, 나프톨 크림슨), 미젤로 매트 화이트, 리퀴텍스 모델링 페이스트.
  • 치유적 접근:
    1. 경계의 확장: 벽을 ‘단절’이 아닌 ‘상상력의 도구’로 재정의하여 아동의 심리적 안전감을 도모하고 세상과의 소통 통로를 탐색함.
    2. 감각의 통합: 지우개를 이용한 찍기(도장) 행위를 통해 반복적인 신체 리듬을 경험하고, 모델링 페이스트의 텍스처를 통해 촉각적 자극과 정서적 정화(Catharsis)를 유도함.
    3. 자기 효능감과 수용: 정교한 줄 맞추기라는 인지적 과제 대신, 각자의 리듬대로 벽을 쌓아 올리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방식을 긍정하고 결과물을 수용하는 자기 수용의 경험을 강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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