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담위를 오르는 즐거움

껍질을 깨고 날아오르기까지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담장’을 만난다. 그리고 그 담장 앞에서 습관처럼 되묻는다. “이 담을 넘어갈 수 있을까? 혹시 떨어지면 어떡하지?”

마더 구스(Mother Goose)의 동요 속 험프티 덤프티(Humpty Dumpty)는 담장에서 떨어져 다시는 회복되지 못한 불운의 상징이었다. 그는 본래 인간의 근원적인 취약성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젊은 시절, 나는 이 세상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실에  화가 났었다. 똑같은 출발선에 설 수 없다는 불평등에 대한 알수 없는 분노가 있었다., 그 기울어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우리가 마주한 ‘결핍’이라는 이름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어쩌면 우리에게 삶을 대하는 아주 독특한 숙제를 던져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줄에 서서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달리기만 한다면, 과연 세상에 어떤 발전과 진보가 있을 수 있을까?

이제 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사회학적인 불평등으로만 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이를 철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운동장이 기울어졌기에 우리는 똑같은 방법으로 달릴 수 없다. 각자가 발을 디디는 위치와 각도가 다르고, 그 기울어짐을 극복하거나 혹은 즐기며 나아가는 각자의 방식이 생겨난다. 결국 인간은 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출발해도 저마다의 다양한 과정과 결과를 습득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서사를 써 내려가는 존재들인 것이다.

댄 샌탯(Dan Santat)의 그림책 《떨어질까 봐 무서워 After the Fall : How Humpty Dumpty got back up again》속 험프티 덤프티는 바로 이 점을 보여준다. 그는 깨진 껍질의 흔적을 간직한 채, 다시 담장 위로 올라갈 준비를 하는 용기 있는 생존자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동요 속의 취약한 험프티를 넘어, 끊임없이 담장을 세우고 오르는 내 삶의 모습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쉼 없이 새로운 담을 오르는 삶의 과정

돌이켜보면 내 삶은 늘 담장과 함께였다. 성인이 되어 시작한 미대 공부, 낯선 땅 독일에서의 유학, 그리고 오십의 나이에 도전한 임상심리사 2급 시험까지. 사람들은 이것을 부러워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그저 내가 세운 담장을 오르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날아오르는 순간’의 희열만을 결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자격증 시험을 치르고 나오며 나는 알게 되었다.. 시험 직후의 짜릿함보다, 사실 나를 더 살게 했던 것은 그 시험을 준비하던 3년의 시간, 그리고 3개월 동안의 시험기간 동안 하루하루 작은 담들을 넘기 위해 애쓰던 성실한 과정들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날아오르는 것도 좋지만, 다음 담을 올라갈 생각에 가슴 설레는 그 준비의 과정 자체가 내게는 더 큰 즐거움이었다.

반두라의자기효능감과 담을 오르는 동력

 알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의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은 내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반두라에 사회학습이론에 따르면, 자신이 어떤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핵심 동력이다. 나는 임상심리사 시험을 준비하며, 하루치 목표라는 작은 담들을 매일 조금씩 넘어섰다.

내가 느끼는 성취감은 거창한 성공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의 계획을 실천하고, 공부의 과정을 조절하며, 그 작은 과업들을 완수해 나가는 ‘자기 조절'(Self-regulation)의 과정 속에서 나의 효능감은 단단해졌다. 나는 내가 담을 오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오는 확신이 나를 다시 비행하게 하는 연료가 되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계속 도전하느냐”고 물을 때, 나는 그게 바로 나라는 사람의  에너지라고 답하고 싶다.

꿈속의 비행, 그리고 아프락삭스

어릴 적 꿈속에서 나는 자주 하늘을 날았다. 깜깜한 밤, 팔을 옆으로 쭉 뻗어서 동네의 옥상 위를 전깃줄을 피해  저공비행하던 그 감각.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üskind)의 소설 《깊이에의 강요 Die Geschichte von der Tiefe》속 주인공처럼 열심히 발을 구르며 땅을 박차고 오르던 그 동력은, 지금 내가 담장을 오르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데미안 Demian》은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라고 말한다. 험프티 덤프티가 끝내 달걀 껍질을 깨고 새가 되어 날아갔듯, 우리 모두는 각자의 알 속에 갇혀 내가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 껍질 안에 있을 때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를 밀어 올려 껍질을 깨고 나가는 고독한 비행을 시작할 때,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드러난다.

날아 오르는 것보다 중요한 것들

많은 이들이 내가 꿈에서 날아다녔던 경험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지금 마주하고 있는 그 위태로운 담장과,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그 마음 자체가 당신이 비행을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내가 그림책 테라피수업에서 항상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고, 우리 삶의 모든 담장 앞에는 그 질문이 놓여 있다.

날아오르는 순간의 박수갈채보다, 껍질을 깨기 위해 안에서부터 스스로를 밀어 올리는 그 성실한 시간을 사랑하자. 오늘도 나는 다시 담장 앞에 선다. 이번에는 또 어떤 풍경을 보게 될까. 설령 바로 날지 못하더라도 좋다. 담 위를 오르는 그 설레는 준비 과정이야말로,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비행이니까.

당신은지금어떤담장앞에서있나요? 혹시지금그담을오르기위해준비하는과정이, 사실은이미당신을날게하고있는것은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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