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들의 도시》를 읽고
김주혜 작가의 전작 《작은 땅의 야수들(Beasts of a Little Land)》을 읽었던 기억 덕분에, 이번 신작 《밤새들의 도시(City of Night Birds)》 역시 망설임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비록 이 작품이 국내에서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얻지는 못했더라도, 작가가 톨스토이문학상(Yasnaya Polyana Literary Award)을 수상했다는 소식은 과거 내가 느꼈던 독서의 감흥이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가끔 이처럼 어린 나이에도 삶의 본질을 꿰뚫는 깊은 통찰을 마주할 때면, 묘한 질투나 시기의 감정이 스치기도 한다. ‘나는 저 나이 때 그토록 방황하고 미성숙했는데, 어찌 저토록 깊은 사유를 품을 수 있을까’ 하는 씁쓸함과 경외가 교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깊이 있는 문장들이 누군가의 인용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 만들어낸 사유라는 점에서 오는 충격은 매우 컸다. 특히 이 책은 대학교 ‘치료적 현존(Therapeutic Presence)’ 수업 중 교수님이 예술의 본질을 설명하며 언급한 계기로 더욱 깊이 다가왔다. “발레의 기교는 가르칠 수 있으나,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 것은 가르칠 수 없다”는 맥락 속에서 이 책은 발레가 아닌 ‘인생이라는 거대한 수업’에 대한 은유로 다가왔다.
베라 이고레브나(Vera Igorevna)와 나타샤(Natasha)의 대화 중 등장하는 “최고가 되려는 욕망만 쫓는 사람은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어”라는 구절은 예술을 넘어 삶을 관통하는 화두를 던진다.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 추구의 출발점이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인지 타인의 기대에 의한 것인지 흐려지게 된다. 오직 성취와 욕망만을 쫓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진짜 모습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발레라는 화려하고도 가혹한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지지만, 그 안에서 인물들이 겪는 내적 갈등은 철저히 실존적인 인간의 고립(Isolation)과 맞닿아 있다. 주인공 나탈리아 레오노바(Natalia Leonova)는 진지하고 우울하며 강박적인 동시에 신비로운 아우라(Aura)를 풍긴다. ‘조가비 빛깔의 입술’이나 ‘높은 광대뼈’ 같은 생생한 외모 묘사뿐만 아니라, 실제 영화 《병사의 발라드(Ballad of a Soldier)》의 여배우 잔나 프로호랭코(Zhanna Prokhorenko)를 연상시키는 디테일은 소설의 허구를 현실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니콜라이(Nikolai)의 거친 눈빛과 전나무 같은 성품, 엄마 안나 이바노브나(Anna Ivanovna)의 서투르고 소심한 사랑 등 입체적인 인물 군상은 독자로 하여금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만든다.
특히 탁월한 심리 묘사와 감각적인 색채 언어로 독자의 머릿속에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훈훈한 밤공기가 보랏빛으로 달아오른다” 같은 문장은 단순히 시각적 묘사를 넘어, 회색빛과 보랏빛이 묘하게 섞인 오묘한 정서적 온도를 피부로 느끼게 만든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가치 조건화(Conditioning of Worth)에 갇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채찍질하던 나타샤의 모습이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소피아(Sophia)조차 품고 있는 각자의 결핍은 독자의 마음을 깊이 두드린다. 소설 속에서 나타샤가 상처를 입고 절뚝이며 들어가 마주하는 ‘뜨거운 물’은 매서운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상징적 매개체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에게도 삶의 피로를 씻어내는 ‘뜨거운 물’ 같은 존재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었다.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 자리에 있어 주는 책과 그림, 그리고 멀리서 묵직한 문장을 건네는 작가들의 존재야말로 고단한 일상을 버텨내게 하는 든든한 둥지이자 안전기지(Secure Base)다.
작품 중반부, 프로코피예프(Prokofiev)나 알렉세이(Alexei)를 통해 던져지는 메시지들 역시 삶의 진리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을 묘사할 때, “그에게는 아이러니가 있어요. 그가 하는 말과 그가 뜻하는 의미가 다르죠. 갈등하는 마음처럼 그의 음악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인생과 참 비슷하지 않나요.” 194쪽에서는 ”10대에서 20대까지의 아름다움은 남에게서 받은 것이지만,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남에게 무엇을 주느냐에 따라 외모가 달라진다”는 구절이나, “최고의 짝은 서로 다른 둘이 합칠 때 탄생한다”는 나무에 대한 비유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되새기게 한다. 드미트리(Dmitri)를 향한 질투와 메데이아(Medea)의 신화적 비극을 교차시키며 인간 본성의 파괴적 욕망을 탐색하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결국 인생이란 모든 것이 실수이면서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실수가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수렴된다.
이야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나타샤는 “제가 해냈어요. 엄마를 위해서” 조건화된 사랑의 방식에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이 생긴 나타샤를 만났다. “인생은 아주 짧고 죽음은 영원하다”는 깨달음과 함께 타인을 기쁘게 하려는 강박을 내려놓는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비로소 존재감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 그녀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감(Emancipation)을 맞이한다. “예술의 정점은 이타심에 있으며, 자아를 잃는 것이야말로 곧 예술의 정점이다”라는 역설적(Paradoxical) 진실은 삶의 무게를 내려놓는 법을 가르쳐준다. 소설이 시간의 흐름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랩스(Time-lapse)식 구조를 취하고 있음에도 몰입도가 깨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고독과 자유,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다루는 실존적(Existential) 주제의식이 촘촘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을 덮으며 가장 깊게 남은 문장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내가 예술을 장악하는 게 아니라 예술이 나를 장악한다”는 고백이다. 우리는 삶을 내 의지대로 쥐고 흔들 수 있다고 믿지만, 정작 삶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거대한 흐름과 분위기 속에서 움직인다. 결과를 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며 주도권을 쥐려 할수록 인생의 매듭은 더욱 단단히 엉켜버린다. 그러므로 순간순간에 온전히 충실하며 불확실성을 유연하게 수용하는 것, 그리고 남들을 이기는 성공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해답이다. 길을 잃고 헤매더라도 언제든 내 안의 안전한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을 안고, 삶이라는 거대한 미로를 기꺼이 통과해 나가는 것—그것이 바로 이 찬란한 소설이 건네는 가장 깊은 위로이자 가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