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가을에게 봄에게』를 다시 읽으며
처음 이 그림책을 그림책 테라피 수업에서 만났을 때, 나의 시선은 ‘관계’라는 외부를 향해 있었다. 봄과 가을이라는 인물, 그리고 그 사이에서 편지를 전하는 여름과 겨울이라는 매개자들.
가을?
그러고 보니 나는
가을을 만난적이 없네.
어느 날 겨울이 말했습니다. ” 가을은 따뜻한 아이야.”
언젠가 여름은 말했지요.
“가을은 차가운 녀석이라고.”
누군가에게는 따뜻하게, 또 누군가에게는 차갑게 비치는 계절의 성질을 보며 나는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인 판단’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 봄과 가을은 나와 타인이었다. 정말 다른 사람, 혹은 성별로 나누어 본다면 남과 여처럼 서로 다르기에 끌리고 궁금하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 같은 관계라고 생각했다. 시간적 연속선상에 위치만 다를 뿐, 같은 계절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영영 마주할 수 없는 그런 거리감 말이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다시 빌려 눈으로 읽고, 그림을 천천히 훑고, 소리 내어 문장을 읊조리는 일 년의 과정 속에서 나의 해석은 완전히 다른 궤도로 진입했다. 어쩌면 봄과 가을은 서로 다른 인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성격의 파편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성격이 하나라고 믿고 살아가지만, 사실 내 성격의 저 끝에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이 존재한다. 이것은 칼 융(Carl Jung)이 말한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융은 모든 인간이 생물학적인 성별과 상관없이, 무의식 속에 반대 성별의 특성을 내면화하고 있다고 보았다. 여성에게 남성성이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 삶의 깊이를 더해갈 때 비로소 그 남성성(아니무스)이 발현되는 것을 우리는 느낀다. 사실 그것은 그때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지만 눈치채지 못했던 나였을 뿐이다. 여자로서 아니무스를, 남자로서 아니마를 찾아가는 과정은 결국 나라는 사람의 전체성을 향한 여정일 것이다전체성을 향한 여정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두 모습이 하나로 섞여 녹아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타인을 이해하는 창구이기도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성숙한 인격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마주해야 할 내면의 동반자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하나로 섞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란히 존재하는 ‘상호보완적 공존’의 상태라는 점이다.다.
우리는 흔히 성격의 스펙트럼에서 양 끝에 위치한 것들을 억지로 통합해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격은 색깔과 같아서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다. 그저 그 자체로 고유한 색깔일 뿐이다. 내가 그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할 수도 없다. 그 색깔 역시 온전한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는 통합이란 억지로 하나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융이 말한 ‘개별화(Individuation)’ 즉 자기 내면의 다양한 모습을 인정하고 통합하여 온전한 내가 되는 과정이란, 억지로 하나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남성은 자신의 섬세하고 직관적인 면(아니마)을 인정할 때 더 온전해지고, 여성은 자신의 논리적이고 결단력 있는 면(아니무스)을 수용할 때 삶의 주권을 확고히 할 수 있듯, 나라는 존재의 다양한 색깔을 인정하고 굳이 하나로 뭉치려 하지 않아도 그저 그 상태 그대로 나란히 두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도달해야 할 온전한 상태가 아닐까.
우리는 만날 수 없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만나지 못해도 언제나 좋은 친구.
이제 봄과 가을은 더 이상 평행선 위에서 만날 수 없는 타인이 아니다. 내 안의 성격적 스펙트럼 속에서, 오늘도 각자의 빛깔로 머물며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 나 자신이다. 비록 영원히 하나로 섞일 수는 없지만,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며 나란히 걷는 것. 이것이 내가 그림책 『가을에게 봄에게』를 통해 마주한, 나라는 계절의 풍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