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재료]긁고, 녹이고, 덧입히다

‘벽’을 대하는 서로 다른 시선들

지난번 수채화와 철필로 성곽의 결을 기록했던 작업에 이어, 이번에는 조금 더 직접적이고 강렬한 방식의 ‘스크라피토’를 시도했습니다. 장애 아동들과 함께 ‘벽’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며, 우리는 도구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의 흔적을 남기는 실험을 했습니다.

나이프와 나무젓가락, 그 사이의 다정한 거리

스크라피토의 정석은 색상을 두껍게 칠하고 그 표면을 철필로 그 위를 긁어내어 명도의 대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번 수업에서는 검은색 흑켄트지 위에 오일 파스텔을 듬뿍 올린 뒤 긁어내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장애아동 대상이라, 다소 무리가 갈 것 같아서, 흑켄지를 활용해서 한번의 색상 층을 칠하는 과정을 생략하였습니다.

저의 경우, 날카롭고도 면이 넓은 나이프를 활용해 긁는 힘의 강약에 변화를 주며 성벽의 견고함을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나이프는 꽤 까다로운 도구였습니다. 납작한 면을 세우고 눕히며 자유자재로 다루기에는 그 무게와 감각이 낯설었기 때문이죠. 고민 끝에 우리는 아이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자신의 힘을 전달할 수 있는 ‘나무젓가락’을 도구로 선택했습니다. 수업을 준비하면서 언제나 변수는 생기게 마련입니다.

비록 도구는 달랐지만, 흑켄트지 위를 긁어내며 어둠 속에서 빛을 끌어올리는 아이들의 집중력은 나이프를 쥔 저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진지했습니다.

오일 파스텔의 변주, 불꽃으로 텍스처를 더하다

긁어내는 행위만으로는 벽의 입체감을 완전히 담아내기에 조금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지막 마감 단계에 특별한 시도를 했습니다. 오일 파스텔을 불에 살짝 녹여 캔버스 위에 덧입히는 ‘열(熱)의 기법’을 더한 것입니다.

녹아내린 파스텔은 마치 시간이 흐르며 풍화된 성벽의 이끼나 거친 돌의 질감처럼 두툼하고 불규칙한 텍스처를 만들어냈습니다. 차가운 흑켄트지와 뜨거운 열이 만나 완성된 표면은 단순히 칠해진 그림이 아니라,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살아있는 벽’이 되었습니다.

성곽을 짓는 마음으로

먼저 긁고 수채화를 번지게 했던 작업이 벽의 ‘구조와 흐름’을 이해하는 시간이었다면, 오일 파스텔을 긁고 녹여낸 이번 작업은 벽의 ‘물성과 시간’을 체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벽을 그리며 동시에 성곽을 쌓아 올렸습니다. 손끝에 전달되는 저항감을 느끼며,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틈을 메우고 단단한 마음의 울타리를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내고, 때로는 뜨거운 온기로 녹여내며 만들어진 이 거친 텍스처들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내며 겪어온 시간의 흔적들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긁어낼수록 더 선명해지는 어둠 속의 빛. 우리가 만든 이 벽들이, 아이들에게도 또 저에게도 언제든 기대어 쉴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Tip. 이번 작업의 포인트

  • 준비물: 흑켄트지, 오일 파스텔, 나무젓가락(아동용), 나이프(교사용), 가열 도구
  • 핵심 과정:
    1. 흑켄트지 위에 오일 파스텔을 도톰하게 채색하기
    2. 도구(나이프 또는 나무젓가락)의 각도를 활용해 긁어내기(강약 조절)
    3. 오일 파스텔을 살짝 녹여 텍스처를 얹어 마무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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